눈이 오는 날, 산에 오르면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날이면 혈관 속을 흐르는 혈액 소리마저 들릴 듯 고요합니다. 그럴 때면 빗소리처럼 내리는 눈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마치 무아지경에 이른 듯, 온전히 자연과 하나 되는 신비로운 경험이죠.
처음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었던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함박눈이 쏟아지던 겨울 한낮, 모든 생명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숨어든 시간이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어린 마음에 눈으로 뒤덮인 산의 모습이 궁금했던 저는 발목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막대기를 짚고 뒷산으로 향했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건 마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탐험가가 된 듯했습니다.
하지만 30cm가 넘게 쌓인 눈 때문에 길을 잃을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작은 개울조차 찾아볼 수 없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허리까지 눈 속에 파묻힐 수도 있었죠. 뒤따르던 강아지도 눈에 코를 파묻고 열심히 탐사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억을 더듬어 늘 다니던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눈에 덮인 빨간 열매를 발견했죠. 나중에 덜꿩나무라는 걸 알게 된 그 나무의 빨간 열매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 순간, 눈이 쌓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 후로는 산에 가지 않아도 집 마루에 앉아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소리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 덕분이었죠. 하지만 도시로 이사 온 후에는 많은 소음 때문에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끔 어린 시절, 눈 덮인 산을 탐험하던 순수했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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