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에서 ‘산너머’는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였습니다.
단순히 산너머가 아닌,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 곳이었죠.
시골집에서 대문을 열고 나와 마을 뒤쪽으로 길을 따라서 10분 정도 가다 보면 갈래길이 나오고, 왼쪽 길로 접어들면 바로 산으로 이어집니다.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을 지나 20분 정도 올라가면 산 능선에 다다르는데, 그곳을 ‘산너머’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집 밭은 산너머와 마주 보고 있어서 자주 산책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 산이 서로 5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분위기가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었죠.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혼자서는 잘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제 나이 20세 때, 도시에서 생활할 때, 고향집을 방문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느 때처럼 반들반들한 막대기를 손에 쥐고(어머니는 제가 아끼는 막대기라고 땔감으로 쓰지 않고 여전히 마루 한편에 보관해 주셨어요)) 산에 올랐습니다.
소년이었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산이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너머가 있는 산에서 자라고 있던 소나무가 전부 베어지고 편백나무 묘목이 줄지어 심어져 있었어요.
숲이 휑해져 숲 속 깊은 곳까지 시야가 트였습니다.
막연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한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숲을 지키는 첨병인 청미래덩굴을 헤치고 숲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숨이 턱 막힐 듯 아름다운 깽깽이풀 군락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계곡을 따라 온천지에 피어있는 깽깽이풀이었어요.
깽깽이풀 집단 서식지를 발견한 것이지요.
이름도 정겨운 깽깽이풀. 황홀한 연보라빛 꽃은 온 숲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죠. 멸종위기종이었으나 지금은 멸종위기에서 해제된 식물이에요.
가보지 않은 장소,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났어요.
깽깽이풀을 보았을 때의 기억은 오롯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답니다.
산너머
어린 날, 산너머는 미지의 세계
겁 많은 발걸음 멈추게 한 낯선 숲
푸른 소나무 울타리, 햇살 가린 그늘 아래
두려움에 떨던 작은 나
세월은 흘러, 푸른 잎은 졌고
낯선 나무들이 자리를 메웠네
텅 빈 가슴, 휑한 숲길을 걸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지
그때 발견한 너, 깽깽이풀
연보랏빛 꿈결 같은 너의 모습에
심장은 뛰고, 마음은 설레었지
오랜 침묵을 깨고 피어난 너의 아름다움에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너는 여전히 그 자리에 피어 있구나
작은 꽃 한 송이에 담긴
생명의 강인함과 아름다움
산 너머, 잊혀진 기억 속에서
너를 만나 다시 살아나는 나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품고 살아가리
'식물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산의 추억 (0) | 2024.12.02 |
---|---|
눈 내리는 소리 (0) | 2024.12.01 |
작은 밭 가는 길 (0) | 2024.11.29 |
풀과 나무가 있어 산에 간다 (0) | 2024.11.29 |